취은일고 (醉隱逸稿)
저자 : 송덕부(宋德溥) / 15세기
모두 上下 2卷 1冊으로 구성되어 있다. 卷上에는 60여 首의 시를 비롯하여 저자가 李琠 등에게 보낸 8편의 서신과 李琠 등이 보내온 5편의 서신이 함께 수록되어 있으며, 부친을 대신하여 지은 2편의 제문을 비롯하여 모두 7편의 제문이 수록되어 있다. 卷下는 부록으로 李在寬이 지은 저자의 行狀을 비롯하여 鄭宗魯가 지은 저자의 墓誌銘이 수록되어 있고, 康用良 등 40여 명이 지은 輓詞와 강용량 등 3명이 지은 제문도 함께 실려 있다. 특히, 부록에는 洪汝河 등 친구들이 보내온 시 10여 수와 詩나 글을 지어 전한 일이나 일상의 안부를 전하는 친구들이 보낸 7편의 간찰도 추가로 수록되어 있다.
주자서절요 (朱子書節要)
저자 : 주희(朱熹) / 16세기
『주자서절요』는 이황(李滉 ; 1501~1570)이 『주자대전(朱子大全)』 중에서 중요한 부분을 뽑아 편찬한 책이다. 중국 성리학의 최고봉이자 편자가 사숙(私淑)한 주희(朱熹)의 학설을 주희의 입장에서 자상하게 소개한 것이다. 권두에 이황의 서문이 있고, 권말에 황준량(黃俊良)과 기대승(奇大升)의 발문이 있다. 이 책은 주희의 사상을 총정리한 것으로 우리나라 성리학연구의 근거를 이 책에 두고 있다. 특히, 조선 중기 이후 우리나라에서 성리학 연구가 활발해진 것도 이 『주자서절요』의 출간으로 일어난 학계의 변화라고 볼 수 있다.
운천선생문집 (雲川先生文集)
저자 : 김용(金涌) / 17세기
저자의 현손(玄孫) 김창석(金昌錫)이 1694년(숙종 20)에 수집·편차하여 初刊本을 간행하였다. 그 후 1881년(고종 18)에 화재로 판본이 소실되어, 1898년(광무 2)에 중간하였다.
본집 5권과 부록 2권으로 구성되었다. 본집 5권 중 권1, 2에는 시 396수와 賦 2편이 실려 있다. 권3에는 疏 1편, 書 5편, 雜著 1편, 序 2편, 敎書 1편, 箋 2편, 上樑文 2편이 실려 있다. 권4에는 제문 28편, 墓碣 2편, 墓誌 3편이 실려 있다. 권5에는 숙부인 학봉선생의 언행록이 실려 있다. 부록은 2권으로 권1은 世系圖와 年譜로 되어 있고, 권2는 行狀, 碣文, 誌文, 祭文, 輓詞, 遺墨으로 되어 있다. 잡저의 「募兵文」은 임진왜란 때 안동수성장으로 임명된 저자가 의병을 모집하기 위해 도내 각 읍에 보낸 격문인데 그의 우국충정이 담긴 명문이다.
수암선생문집 (修巖先生文集)
저자 : 류진(柳袗) / 18세기
『수암집』은 조선 중기의 문신인 유진(柳袗 ; 1582∼1635)의 시문집이다. 유진의 자는 계화(季華), 호는 수암(修巖), 본관은 풍산(豊山)이다. 이 책은 1734년(영조 10)에 후손 위하(緯河)·성화(聖和)가 편집·간행하였다. 유진의 아버지는 영의정 성룡(成龍)이다. 그는 임진왜란 뒤 아버지에게서 글을 배우고 1610년(광해군 2)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1612년 해서지방에서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이 일어났을 때에 무고를 당하여 5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616년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세자익위사세마(世子翊衛司洗馬)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였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뒤 다시 학행으로 천거되어 봉화현감이 되었다. 1627년에 청도군수가 되었다가 1634년 지평이 되었다. 이때 장령 강학년(姜鶴年)이 당시 서인정권의 정책을 크게 비판하여 심한 논란이 일어났는데, 그를 두둔하여 대간들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고관대작을 역임하지는 않았지만 세신(世臣)의 후예답게 깨끗하고 성실하게 생애를 보냈다. 그는 사후에 이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안동 병산서원(屛山書院)에 제향되었다.
퇴계선생언행록 (退溪先生言行錄)
저자 : 미상(未詳) / 19세기
『퇴계선생언행록』은 이수연(李守淵 ; 1693~1748)이 편찬한 이황(李滉)의 언행에 관한 기록이다. 이수연의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희안(希顔), 호는 청벽(靑璧)이다. 이 책은 권두경이 편찬한 『퇴도선생언행통록』의 착오를 바로잡아 도산서원에서 중간하였다. 권두경이 편찬한 것을 화산본(花山本)이라 하고 이수연이 편찬한 것을 도산서원본이라 한다. 언행록은 목록 다음에, 25인의 차기제자(箚記諸子)들과 『가서(家書)』·『당후일기(堂后日記)』 등 5종의 인용서적을 기록한 「퇴계선생언행차기제자목록(退溪先生言行箚記諸子目錄)」이 수록되었고, 이어 언행록 5권과 부록 1권이 수록되어 있다. 이 자료는 퇴계의 언행에 관한 부분을 발췌하여 편성한 책으로서, 도학자로서의 언행일치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자료로 평가된다.
도산급문제현록 (陶山及門諸賢錄)
저자 : 미상(未詳) / 20세기
『도산급문제현록』은 창설재(蒼雪齋) 권두경(權斗經 ; 1654~1726)이 편찬한 『계문제자록(溪門弟子錄)』에 이황(李滉 ; 1501~1570)의 후손인 청벽(靑壁) 이수연(李守淵 ; ?~1748)·산후(山後) 이수항(李守恒 ; 1695~1768)·광뢰(廣瀨) 이야순(李野淳 ; 1755~1831) 등이 증보하여 『이학통록(理學通錄)』의 체계를 따라서 간행한 이황 문인의 행적에 대한 기록이다.
첫머리에는 범례, 목록, 이황의 자명,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 ; 1527~1572)의 「문순공퇴도이선생묘갈명(文純公退陶李先生墓碣銘)」, 월천(月川) 조목(趙穆 ; 1524~1605)의 「언행총록」이 수록되어 있다. 이어 권별로 된 목록이 있다. 모두 309명으로 대개 생년순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기술내용을 보면 각 인물마다 자·호·본관·거주지·생몰·사적 등을 기록하였다. 사적은 주로 이황과 관련된 사항들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하당집 (荷塘集)
저자 : 권두인(權斗寅) / 미상(세기)
하당(荷塘) 권두인(權斗寅)의 문집이다. 김한동은 그의 서문에서 『하당집』은 모두 10권으로 그 원집 여덟 권은 눌은선생(訥隱先生)이 편찬한 것으로 서문이 있으며 속집(續集) 두 권은 남야선생(南野先生)이 교정한 것인데 중간에 상화(喪禍)로 인하여 간행할 겨를이 없어 쌓여 있은 지 오래되었다고 하였다. 경오년 여름 그의 후손인 재덕(載德)이 노소 친척들과 상의하여 권두인 사후 92년 만에 이 책을 간행하였다고 하였다. 이어서 권두인이 안동 지방에서 유학의 맹주(盟主)로서 후학들을 정성으로 가르쳐 문헌의 고장으로 만들었는데 백년 사이에 유풍이 점점 사라져 선비들의 추향이 예스럽지 못한 것을 한탄하였다. 김한동은 권두인의 문장이 드러나고 감추어지는 것이 유학의 성쇠(盛衰)와 직접 관계된 것이라고 하였다.
이현보 (李賢輔) 1467년 ~ 1555년
이현보의 자는 비중(棐仲), 호는 농암(聾巖), 설빈옹(雪靈翁), 예안 출신. 참찬 흠(欽)의 아들이다. 1498년(연산군4) 식년문과에 급제한 뒤 32세에 벼슬길에 올라 예문관검열, 춘추관기사, 예문관봉교 등을 거쳐, 1504년 38세 때 사간원 정언이 되었으나, 서연관의 비행을 논하였다가 안동에 유배되었다. 그 뒤 중종반정으로 지평에 복직되어 밀양부사, 안동부사, 충주목사를 지냈고, 1523년에는 성주목사로 선정을 베풀어 표리(表裏)를 하사받았으며, 병조참지, 동부승지, 부제학 등을 거쳐 대구부윤, 경부부윤, 경상도관찰사, 형조참판, 호조참판을 지냈다. 1542년 76세 때 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고향에 돌아와 만년을 강호에 묻혀 시를 지으며 한거하였다. 홍귀달(洪貴達)의 문인이며, 후배인 이황(李滉), 황준량(黃俊良) 등과 친하였다. 조선시대 자연을 노래한 대표적인 문인으로 국문학사상 강호시조의 작가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작품으로는 「어부가(漁夫歌)」,「효빈가(孝嚬歌)」, 「농암가」,「생일가(生日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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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영 (張錫英) 1851년 ~ 1926년
본관은 인동(仁同). 일명 석교(碩敎). 호는 회당(晦堂). 경상북도 칠곡출신이다. 1905년 일제가 무력으로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통분하여 일제침략을 규탄하고 을사조약의 파기와 을사오적의 처형을 요청하는 「청참오적소(請斬五賊疏)」를 이승희(李承熙)·곽종석(郭鍾錫)과 함께 올렸다.
1907년 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 전국에 파급될 때 칠곡지방의 국채보상회 회장으로 추대되어 활동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나자 곽종석·김창숙(金昌淑) 등과 협의하여 파리평화회의에 제출할 독립청원서 초안을 작성하였으며, 성주 장날의 독립만세운동에 적극 참가하였다가 일본경찰에 붙잡혀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1925년 제2차 유림단운동이 있을 때 영남대표로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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