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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별 고도서

선인들의 생각과 사상을 시기별로 살펴보는 시대별 고도서

이현보 (李賢輔) 1467년 ~ 1555년

이현보의 자는 비중(棐仲), 호는 농암(聾巖), 설빈옹(雪靈翁), 예안 출신. 참찬 흠(欽)의 아들이다. 1498년(연산군4) 식년문과에 급제한 뒤 32세에 벼슬길에 올라 예문관검열, 춘추관기사, 예문관봉교 등을 거쳐, 1504년 38세 때 사간원 정언이 되었으나, 서연관의 비행을 논하였다가 안동에 유배되었다. 그 뒤 중종반정으로 지평에 복직되어 밀양부사, 안동부사, 충주목사를 지냈고, 1523년에는 성주목사로 선정을 베풀어 표리(表裏)를 하사받았으며, 병조참지, 동부승지, 부제학 등을 거쳐 대구부윤, 경부부윤, 경상도관찰사, 형조참판, 호조참판을 지냈다. 1542년 76세 때 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고향에 돌아와 만년을 강호에 묻혀 시를 지으며 한거하였다. 홍귀달(洪貴達)의 문인이며, 후배인 이황(李滉), 황준량(黃俊良) 등과 친하였다. 조선시대 자연을 노래한 대표적인 문인으로 국문학사상 강호시조의 작가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작품으로는 「어부가(漁夫歌)」,「효빈가(孝嚬歌)」, 「농암가」,「생일가(生日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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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영 (張錫英) 1851년 ~ 1926년

본관은 인동(仁同). 일명 석교(碩敎). 호는 회당(晦堂). 경상북도 칠곡출신이다. 1905년 일제가 무력으로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통분하여 일제침략을 규탄하고 을사조약의 파기와 을사오적의 처형을 요청하는 「청참오적소(請斬五賊疏)」를 이승희(李承熙)·곽종석(郭鍾錫)과 함께 올렸다. 1907년 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 전국에 파급될 때 칠곡지방의 국채보상회 회장으로 추대되어 활동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나자 곽종석·김창숙(金昌淑) 등과 협의하여 파리평화회의에 제출할 독립청원서 초안을 작성하였으며, 성주 장날의 독립만세운동에 적극 참가하였다가 일본경찰에 붙잡혀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1925년 제2차 유림단운동이 있을 때 영남대표로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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